을사오적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을 일컫는다.
조선 말기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무력행사를 통해 청나라 세력을 꺾고(청일전쟁, 1894), 다음의 경쟁 세력인 러시아를 러일전쟁(1904. 2)으로 격파한 다음,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침략 상호 묵인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의 실질적 침략인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주조선일본군사령관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어전회의에 참석한 각료들을 강압적으로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건강상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부 대신들이 찬성을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반대하고 임금께 고하러 가다가 졸도까지 하였다. 당시 총 9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의 대신은 약간의 내용 수정을 한 다음에 최종 찬성하고 서명하였다. 그들은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으로서, 조국을 왜적에게 팔아먹은 매국노(賣國奴)라하여 역사상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이라 칭한다.
을사늑약은 외교권 포기, 통감부설치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대내적으로 감독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어 주권국가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훼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는 의미를 갖는 조약이었다.
그 결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이 국민을 크게 통분시켰고, 민영환, 조병세 등은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며 이어서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물리적공격,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이 일어났다. 이 조약의 명칭은 한때 일본이 보호조약이란 미명을 사용하였으나, 역사학적으로는 ‘제2차 한·일협약’이라 칭하고, 일반적으로는 보호란 말을 삭제하고 체결된 해를 넣어 '을사조약(乙巳條約)',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强壓性)을 비판하는 뜻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을사오적 [乙巳五賊]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갑진육적
2024년 갑진년에 나라를 팔아먹은 6명을 일컫는다
윤석열(대통령), 한동훈(국민의 힘 당대표), 김건희(직책없음),
조태열(외교부장관), 김형석(독립기념관 관장), 김진태(강원지사)
feat. 사도광산, 군함도, 건국절, 매국노, 친일파,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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